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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민족의 시원지대(환단학숙)

1.파밀(파미르)고원지대
2.천산산맥지대
3.우랄알타이산맥지대
4.바이칼호지대
5.대(소)흥안령산맥지대
6.백두산 장백산 지대
7.태백산 (태백산) 지대


1.파밀고원지대

pamirs(만년의 숨결 파미르)중앙아시아의 대산맥과 고원으로 된 지역 Hindu Kush.Tien Shan.
Himalaya의 각산맥이 합류하여 세계의 지붕(The roof of the world)이라 일컬어진다.
최고봉(Kungun:7,719m)

우리나라의 인터넷자료나 저서 자료가운데의 일부를 안내합니다.
우리 고대사는 천부인의 역사로 봐야 한다.
고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면 기원전 9200년경 인류의 재앙으로 인류가 각 지역으로 분하 하게 되었다.

배달민족의 직계조상이라 일컬어 지는 황궁천인께서 기원전 9200년경 파밀고원 북동쪽 천산주에서 출발하여 후손들의 천성회복을 위하여 물려주신 것이 배달민족의 상징인 천부인이다. 이 천부인은 인세증리(인간과 세상만물의 올바른 도리를 증명하여 밝히는 것)을 위하여 완성하신 천부의 경전이다.
천부인에 설계 되어 있는 우주의 철학은 인간의 천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주만물의 근본과 자연의 운행법칙이 설계되어 있는 법칙이다.

환국의 크기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2만리이며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5만리나 되는 거대한 국가였다. 천부인을 물려받으신 안파견 환인께서는 천산에 살면서 하늘의 하늘이신 천신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주관하고 인간을 생명을 바르게 돌보시고 하늘의 일들을 대리하여 다스리셨다. 남녀동권의 평등한 시대였으며 노인과 젊은이가 일을 나누어서 하였고 스스로 화락과 순리를 이루어 나갔다.

환국에는 12지파, 즉 12개의 작은 나라가 나뉘어 있었으니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시위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 있었다.

오색의 인종이 함께 살았으니 황이족, 백이족, 현이족, 적이족, 풍이족이었다.

오훈의 율법으로 큰 나라를 다스렸으니

성신불위 (성실하고 거짓이 없게 하라)
경근불태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게 하라)
효순불위 (효도하여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하라)
염의불음 (깨끗하고 정의로워 음란하지 않게 하라)
겸화불투 (겸손하고 온화하여 서로간에 다툼이 없게 하라)


문헌 : 징심록(박제상) . 삼성기 상.하(안함노,원동중) 태백일사(일십당 이맥)



[ 환인 7세 ]

1세 환인 안파견 (기원전 7199년~재위불명)

2세 환인 혁서 (즉위불명 재위불명)

3세 환인 고시리 (즉위불명 재위불명)

4세 환인 주우양 (즉위불명 재위불명)

5세 환인 석제임 (즉위불명 재위불명)

6세 환인 구을리 (즉위불명 제위불명)

7세 환인 지위리 (즉위불명 재위불명)


[천부인 왕권]


천산주 - 황궁 (기원전 9200년경 천부인 완성) - 유인 (기원전 8200년경 불을 만듬) - 인파견환인 (기원전 7200년경 인류최초로 국가를 세우심) - 환국 (기원전 7199년 3301년간 통치 환인 7세) - 배달제국 (기원전 3898년 1565년간 통치 환웅18세) - 단군조선제국 (-진한- 기원전 2333년 2096년간 통치 단군 47세) - 북부여 (기원전 239년 201년간 통치) - 고구려 (기원전 37년 705년간 통치) - 대진제국 (-발해- 기원후 668년 258년간 통치)-내용출처 : 내머리 & 고대 배달문명과 우주의 비밀 (책) 환단학숙-


2.천산산맥지대

 

우리나라의 인터넷자료나 저서 자료가운데의 일부를 안내합니다.

단군신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놀랍다.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과 욕단으로 이어지는 ‘천손민족’의 계보에서 욕단이 바로 단군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속 인물 욕단이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를(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 넘어 동방으로 와서 배달나라를 세운 단군인 것이다. 이에 대해 특별 계시인 ‘성경’뿐만 아니라 일반 계시인 ‘자연’에 의해서도 확실히 입증되고 있음이 밝혀져 있다.

한국인의 뿌리는 산이다. 단군신화에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고 적은 것은 우리 민족이 산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부근에서 일어난 현생인류조상족이 흑해연안과 튜란평원을 거쳐 파미르에 붙었다가 거기서 다시 등을 나누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으리라는 이야기는 육당이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한 바 있다. 또 유라시아의 분기점이 되는 그 파미르에서 해 뜨는 고장, 해의 나라(桓國)를 찾아서 동북으로 동으로 길을 더듬어 백두산에 닿은 무리가 바로 환웅족이라는 이야기는 못생긴 책 ‘삼신피’에다가 이 사람이 한 바 있다.
한 민족이 역사살림의 햇빛으로 기어나오기까지의 어둠 속에 가려진 탯집 속의 소식을 개국신화라고 할 때, 우리는 파미르에서부터 해가 그리워 해 사는 땅을 찾아 천산산맥을 밟고 알타이 산맥을 지나 몽고고원의 험산과 싱안링 산맥을 넘어 백두산에 닿아 비로소 나라터를 잡았을 것이다.

東夷族의 優越性(1)


安 秀 吉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新疆省(신강성)의 首都 우루무치에서 北京까지의 비행시간 3시간 반 중에서 2시간 45분이란 긴 시간을 비행기는 沙漠(사막) 위를 날라야 한다. 黃河(황하)가 두 번 연달아 90도를 휘어 '鑁'자를 형성하는 '오르도스(Ordos)' 지역은 옛날 '周'나라 때에는 沃土였지만 지금 중국 西北편 黃河유역은 砂漠이 대부분이다. 蘭州(란주=西安의 西北편)보다 서편으로는 중국이라기보다 '西域(서역)'으로 回族(회족)과 위굴(Uighur)族이 主이고 新疆省부터는 코삭(Cossack)人들도 많다. Cossack이란 '자유인' 또는 '나라 잃은 사람'이란 뜻으로 回族과 함께 한국이나 일본의 얼굴 흰 사람들과 많이 닮아 있다. 新疆省인구의 65%를 차지한다는 Uighur族도 용모는 우리와 무척 닮았다.

東夷의 조상은 莫高窟(막고굴)로 유명한 燉煌(돈황)의 동남 편에 있는 三危山(삼위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三危山에는 사당이 하나 남아 있다고 하지만 모래의 민둥산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 露出(노출)돼 옛날의 높이를 유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인류가 發生했더라도 그 모래바람으로 뼈도 가루가 되어 남아날 것 같지 않다. 莫高窟도 다시 발굴됐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모래로 덮여 있었다. 우리 단군의 孫들은 지금 莫高窟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의 몇 백미터 지하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묻혀있을 가망성은 있다.

檀君(단군)은 하늘에서 이 三危山에 내려와 天山山脈(천산산맥) 푸른 물의 天池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檀君이라는 훌륭한 인물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에서 나오는 實在인물이다. 黃河가 아직 푸르고 티베트(Tibet)의 북쪽,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에 實際로 바다(翰海?)가 있었던 무렵이다.

그때 檀君의 나라는 東西가 2만리였고, 南北이 5만리였다. 당시 360步가 1리였음으로 동서가 2,000km, 그리고 남북이 5,000km정도가 되는 셈이고 지금의 中國의 남쪽 南蠻(남만)의 땅을 넘어 安南으로부터, 북편은 Altai산맥의 서쪽, Balkhash 湖水의 뒤 Kirghiz 高原까지, 즉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계까지가 九夷의 땅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베리아·중국·안남 等인데 이것을 서쪽에서 온 싸울아비 東夷가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桓(환)'이고 '韓(한)'이다. 반대로 물가를 옥토로 개간해 농사짓고 사는 온순한 사람들은 '漢(한)'이다. 나는 前者를 '불의 한'이라 부르고, 後者를 '물의 한'이라 訓 붙인다.

단군은 약육강식의 好戰(호전)족속 '虎'族을 내치고 '熊'族은 문화민족으로 만들어 갔다. 비록 黃河유역이어서 땅이 肥沃(비옥)할 가망성은 있었지만 길들지 않아서 長期개발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勞力을 투입할 만큼 安定되지 못했고, 내일에 대한 믿음이 결여됐다. 수확이 自己 손에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 虎族(호족)들은 참지 못하고 瞬間(순간) 순간의 氣分과, 눈앞 일만 힘 爲主로 챙겼기 때문에 相互間에 일상 損害(손해) 날 일의 되풀이였다. 즉 文化되지를 못했던 것이다.


1. 野蠻에서 天子國, 그리고 '禪讓'으로

상호간 조금만 신뢰가 形成돼 있더라도 사람들의 생존이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을 그러한 野蠻의 생활형태가 계속됐다. 땅은 共同개발을 해서 크게 解決하면 될 터인데 노력을 해도 그 결과가 뒤에 꼭 자기네들 것이 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秩序를 잡아주면 모두에게 이롭고 文化될 수가 있었다. 그 때 단군에게 모아진 信賴(신뢰)가 공동노력을 可能케 했고 收穫과 결실의 妥當한 분배가 이루어졌다. (九桓(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좋아해서 誠服하고 믿어 天帝(천제)의 化身으로 만들어 이를 帝로 삼고 檀君王儉(왕검)이라 했다..... 도랑을 치우고 논밭을 개간하고 蠶業(잠업)을 勸하고 漁獵(어렵)을 시켰다. - 桓檀古記)

이 때 帝位(제위)에 오르는 것은 血統(혈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인물의 '禪'의 정도에 따랐다. 禪通(선통)한 사람이 왕위(당시에는 帝位)에 오르게 됐다. 그 때에는 모두 큰 人物이 되기 爲해서 '道'를 닦았고 공부와 수양을 쌓았다.

弓術(궁술)을 위한 마을의 모임은 사람들의 '禪'의 정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儀式(의식)이었고, '說文'에서는 "東方사람은 大人으로서 활을 따른다"라고 했다. 弓道(궁도)를 神이 내리신 基準으로 본 것이다. 어른들로부터의 활촉(嗐●矢, 호시)의 선물은 '道'를 닦는 인물로 인정해준다는 큰 待接(대접)이였다. 반대로 道를 안 닦는 물질적인 사람들은 마을에서 逐出(축출)되어 떠나 '蠻(만)'이 됐다. 아들에게도 향상이 없고 아둔하면 姓을 안 줬다. 이 무렵 돈황의 땅은 道닦는 사람이 꼭 가야하는 땅이고 禪과 道에 관심이 없으면 추방하고 姓도 안 주는 等 嚴密한 '選民'풍습이 있었다. Hitler가 후일에 추구한 'Super Race'의 출발점이다.

階級에 따라 주거지역을 달리, 즉 나라를 달리해서 사는 현상은 Scythai에서도 관찰됐다. 農奴(농노)들은 Black Scythia라 하여 무덥지만 농사가 잘 되는 濕한 지역에서 살았고, 王과 그 가족들은 '白色스키타이'라하여 濕氣가 없고 고슬고슬 살기 좋은 準사막지역에서 살았다.

이들은 기후로부터의 부담이 없어서 모세관이 가늘어 살갗이 희고 體毛는 별로 없었고 추위를 위해 과도하게 살이 찌는 일이 없었다. 그 중간에 騎馬의 '싸울아비階級'이 살면서 租稅를 거두어 王族Scythai을 받들었다.

極東圈에서도 帝王의 나라였던 '진=Chin' 나라는 북쪽에 있었고 '가지와 잎새, 그리고 豊盛'을 뜻하는 "支那"는 남쪽에 있었다. 지나는 역사상 '진-Chin系'에게 계속 Black Scythai의 입장에 있었다. 즉 최근까지 'Chin'의 農奴의 나라였다. 같은 모양의 '왕국 對 從屬된 백성의 땅'의 관계는 大月國과 月支國 사이에서도 있었다.

東夷의 나라에서는 禪에 관심이 없는 자식들은 부모에게 姓도 못 받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蠻'이 됐는데,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곳에 이주한 '戎'이나 '蠻'들은 육체가 極限기후에 견디기 위해서도 깊은 수염 등, 對應기능을 발달시켜 나쁜 기후에 適應된 體質을 갖게 됐다. 그러한 기후로 因한 육체기능 개발부담은 머리를 쓰고 禪을 닦는 데 더욱 더 不利하게 하는 반면, 살기 좋은 지역에 남는 사람은 道를 닦고 '禪通'을 하고 長壽를 했다(단군은 그 한 분, 한 분이 오래 統治했고, 지금도 敦煌의 서편 Kirghiz에서 Turkmen까지 長壽村이 많다).

'莊子'에 의하면 '禪'을 터득한 仙人들은 '必姑射'의 神人들로서 "그 피부는 어름이나 눈과 같이 희고… (중략) … 强靭한 生命力을 갖고 있으며 精神을 集中시키면 그 宇宙的인 精神작용이 모든 생물로 하여금 災禍도 없고, 疾病도 없고, 饑餓도 없는 平穩한 生의 歡喜를 갖게 해준다"고 했는데 이들은 禪通과 道通을 한 경우이다.

孔子도 "東夷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부러워한 큰 文明을 東夷族들은 이룩한 것이다. 인간들이 野蠻해서 필요이상 서로를 괴롭히는 속에서 弘益人間의 단군정신은 신뢰와 질서를 심어 人生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줬던 것이다. 즉 시대에 앞서 '王權을 통한 秩序'를 도입해서 人間다운 '生'을 享有할 수 있게 해주어 '부러운 나라, 精神文明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 '禪'의 기준으로 政權을 이양하는 것을 '禪讓(선양)'이라 하여 예를 들어 昔脫解王은 가야에 가서 이 '禪'의 경쟁을 통해 정권을 자기에게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金首露王에 판정패하여 물러서서 신라에 가서 후일에 신라왕이 된다. 단 이 舞臺는 지금의 중국이다.

'禪讓'의 예를 들면 신라정권은 초기에는 朴氏가 3대, 昔氏가 1대, 다시 박씨가 4대, 그리고 다시 석씨가 4대, 그리고 金氏가 1대 석씨가 3대 등으로 '禪'중심으로 移讓되다가 그 다음 한참 가서 血統중심으로 된다. 신라가 망할 때에도 경순왕과 그 가족, 즉 王族이 3개월 여행을 해서 가서 고려왕에게 정권의 '禪讓'을 했다. 이것이 人類역사에 자랑할만한 '禪讓'제도로서 우리 문명의 特徵인 것이다.

중국은 '周'대에 '天子'라고 하는 바 王權의 완벽한 神聖化가 확립되어 戰國時代 諸雄들은 감히 왕권은 노리지 못하고 형식상으로나마 '周'의 天子이름을 계속 받들어 천하를 통치했다. 後代에 唐나라는 이 '禪讓의 精神'을 높이 올려 모셔서 자기 정권의 正統化에 힘을 다하여 이에 성공, 백성들에게 神聖하게 보였기 때문에 무리 없이 당시 최강의 거대한 제국이 된 것이다. 東夷의 禪讓문명은 중국, 인도 등에 傳해져서 부러움을 샀고 '동방의 燈불'과 같은 東夷의 나라는 역사를 通해 계속 높임을 받았다.


그밖에 黃金과 비단옷에 반짝이는 '사람 사는 곳' 東洋에 대한 서양인들의 숭배는 수 천년에 거슬러 오른다. Babylon의 옛날에도 Akkad나 Assyria 등 Semite(셈族)들은 농사기술이 卓越한 Mesopotamia 先住民 Sumer人들을 존중했고, Greece의 정신문명을 Roma인들은 소중하게 계승했다.

서양의 동양문명 숭배는 바비론(Babylon)시대를 포함해 5,000년에 이른다. 서양의 동양 숭배는 "ex oriente lux"라는 라틴 말 구절로 잘 나타난다.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뜻이지만 lux는 사치를 뜻하고 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씰크로우드가 바로 '文化와, 사치와, 비단이 흘러오는 비단의 길'이였고, 神話시대 酒神 Baccus도 동양에 왔다가 가면서 비단옷을 입고 호랑이를 타고 Tigris강을 건너 돌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지구의 지각변동에 의해 印度대륙 땅이 Eurasia대륙을 北으로 밀어 올려옴에 따라 '靑海'는 하늘로 밀려 올라서 '天海(翰海?)'라고 불리게 되고 그 물은 점차 빠져나가 오늘날에는 Kokonor 湖를 포함하여 몇個의 호수를 남길 따름이다. 반대로 黃海 북쪽에서는 발해가 꺼져 물 속으로 들어갔다. 天海에서 渤海 또는 韓半島까지를 20,000里라고 한 것이다.

九夷族들은 그 남북 50,000里, 동서 20,000里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天池에서 출발한 檀君의 나라는 중국의 中原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聖君에 의한 德治의 땅'으로 남았고 시대가 요구하는 武裝政權化 路線을 안 따랐기 때문에 秦始皇이 帝國을 만들 때에 단군 조선의 五加는 秦王政에 따르게 됐다(이 秦始皇의 나라는 망한 다음 秦韓, 즉 辰韓이 되어 三韓을 이룬다). 太白敎를 믿고 '蘇塗'를 設置해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은 東夷族의 特徵이다. 실생활은 Shamanism(巫俗-무속)이 지배했다. Shamanism은 후일 불교와 함께 古朝鮮이 발달시킨 정신문명의 결실이며 당시 Shamanism와 고려조까지의 불교는 (오늘날의 여러 국가가 '國敎'라는 것을 지정하는 그러한 政權外的인, 또는 國體 外的것이 아니라)나라의 본질이었다.

한국인들은 Shamanism에 관심을 가져 그 본질을 파악하고 조상의 것으로서 인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같은 모양으로 佛敎도 밖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民族敎養으로 시초의 佛(Buddha)은 第一期 檀君 始祖였던 桓因帝釋(B.C. 8937)이 9번을 도통해서 始初의 Buddha로서 白佛라고 불리었다는 것, 즉 불교는 釋迦牟尼 以前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佛敎는 印度에서 發生하지 않았다. - 이중재著 - 아시아미디어社 參照). 그 후 精神的인 지배는 Shamanism, 그리고 (완전 宗敎化가 되기 以前, 나라 본질이었던) 佛敎의 시대까지 오랫동안 계속됐고 絶對的이었다. 단군의 가르침 태백교는 지금도 살아 있다.

옛날 東夷族의 단군은 이미 周나라 때, 즉 箕子조선 때에 지상의 정권을 포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中原의 땅'의 포기를 말하는 반 토막의 진실이고, 고도의 農業技術을 가졌던 백성들은 諸侯에게 分割되고 東夷族은 여러 정권으로 나뉘어져 '진-Chin系'의 왕조로 最近까지 黃河이남의 농업의 땅 '支那'를 지배해왔다. 漢나라와 당나라도 모두 다 東夷族의 政權이다.

한국은 巫俗 等, 그 '氣'가 센 나라였고 이 根本정신은 新參종교에 편승하거나, 오히려 신참종교가 근본에 있어서 우리 巫俗土壤 위에 뿌리하고 있는 양상이 있다. 오늘날 여러 종교가 세계적으로 信徒數 維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속에서 한국에서만은 유난히 많은 신자수를 確保하면서 꽃 피고 있는 사실에서 우리 국민의 유난한 精神 指向性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 바탕 토양이 결정하는 것이지 갑자기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頭腦중심 性向은 다른 기회에 論하려니와 아무튼 東夷族은 머리를 많이 쓰며 肉體가 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성향이 있다. 요즈음 弓術이나 골프에서도 관찰되는 바이지만 우리 東夷族은 纖細하고, 銳敏하고, 행동이 敏捷하고 재주가 넘치는 민족이다. 즉 사람의 육체기능을 電子회로에 比하자면 신경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지시하고 그 결과를 다시 신경을 통해서 把握하고 再調整을 하는 하나의 系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東夷의 경우는 그 全體 증폭률(loop gain)이 크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뺄셈을 못하는 商人들이 많아서 받은 돈이 물건값+잔돈과 같을 때까지 잔돈의 덧붙임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는 紙幣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자살을 한 소매상들이 있는 지경이다. 반면에 한국인의 정신의 육체지배력은 유난히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이 민첩하다. 技能올림픽에서도 한국인의 몸의 기능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다.

이럭저럭 '精神'과 '氣'의 문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반면에 精神力 過敏으로 인한 病도 생긴다. UN기관에서도 한국인들의 '홧병'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精神이, 그리고 '氣'가 육체를 지배를 하며, 한편 몹시 관념적인 족속들인 것이다. Shaman이란 '신들림' 능력이 존중되는 신앙이다. 즉 '신'이 내리면 몸이 떨리는 족속들인 것이다.

단군이 지상 지배를 포기하고 산신령이 됐을 때 일부 耆老(기로)는 북으로 떠나 東濊(동예) 나라를 만들고, 이것이 후일에 夫餘와 합쳐지고, 다시 辰韓이 되고 마한, 番韓(변한)과 함께 三韓을 이룬다. 즉 지상의 지배도 계속됐던 것이다. 三韓의 역사는 周나라보다 길어서 특히 그 中 番韓(弁韓)의 경우는 B.C. 2224에 소급해서 帝禹의 夏나라 때이고 시조인 蚩頭男 氏는 姬씨 姓이었던 '帝禹'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周는 B.C. 1122)

秦始皇은 '周'왕조가 서쪽에서 왔고, '殷'왕조가 서쪽에서 왔던 것과 같이, 서쪽에서 와서 黃河를 근거로 정권을 확립한 다음 司馬遷으로 하여금 史記를 쓰게 했는데 이는 그 前의 東夷族의 Silk road 및 中原지배의 역사를 말소하고, 그들의 것으로 위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이란 말은 최근에 나왔고 그 동안은 周를 위시한 '진-Chin'의 지배, 즉 동이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南쪽에 農奴國으로서 支那가 있었다.

중국(支那)의 수많은 (팔이 안에 굽은) 史書들에 의한 東夷의 상고사 剽竊簒奪(표절찬탈)에 우리는 눈감아서는 안 된다. 당시 人智의 발달에 따른 人類의 전반적인 武裝政權化 以前 堯舜을 위시해서 여러 聖君 等 좋은 역사의 대부분은 우리의 것이고, 필요이상 野蠻하고 험악했던 人類史에서 "문화되고 예의를 갖추자"는 단군의 교육은 자랑할만한 것으로 '東方禮義之國'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한국민 본성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2. 東夷人의 體質우월성

한국인의 體質을 연구한 사람들은 왜 한국과 같이 추운 나라에 東夷族과 같이 추위를 못 견디는 생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게 됐는지를 모른다고 한다. 濕하고 추운 나라에 살려면 얼굴 및 피부의 毛細管이 굵어서 검붉은 피부가 되어야 한다. 한국族은 몽골族, 키르기스族, 위굴族과 함께 아세아圈에서 가장 가는 毛細管, 즉 흰 피부를 갖고 있어서 濕한 곳에 살 수 있는 체질이 아니다.

Roma史家 Herodotus는 Scythai國이 왕과 백성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東方에서는 흔한 일로서 '江'과 '河'의 남 쪽 '支那'에서는 '漢'이 살고, 燉煌근처는 '韓'을 中心으로 높은 사람이 아니면 살지를 못해서 老子도 도를 닦기 위해서 '陀'의 地域(西北方의 東夷땅)에 가면서 쓴 글을 '西昇經'이라 이름했다(번역본-아시아문화社 -2001년 版).

東夷族은 추울 때에 動物가죽도 애용했지만 웬만할 때에는 여전히 얇은 白衣를 입고 바람이 차게 되면 버선을 신고 대님을 매었다. 공기가 乾燥하기 때문에 추울 때에도 밑으로부터 스며드는 찬바람만 막으면 되고 대님으로 해서 바지 안에는 따뜻한 空氣가 보존된다. 이러한 허술한 옷차림은 공기가 몹시 乾燥한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砂漠지대에서 오랜 동안 지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돈황에서 실크로우드까지의 건조한 공기는 防寒防暑가 쉬워서 모든 체력을 修道에만 集中할 수가 있어서 禪通과 道通을 하는 데 적합했다(禪通과 道通을 하는 데 좋기로 이름난 것은 須彌山으로서 불교도 帝釋桓因(白帝)를 위시해서 陀(天竺國)를 그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高僧들은 꼭 찾게 된다).

東夷族은 피부가 희어서도 존경을 받았다. 人類의 白色애호성향은 지금 세상에서 發說이 허용된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東夷族이 아시아권에서 유독 희어서 有利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장 검은 한국人도 동남아人의 눈에는 부러운 白人들이다)

東夷族은 흰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光線이 강한 砂漠지대에서 熱線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단군시대에 한 동안(2세 扶婁帝 때) 머리를 따(編髮)고, 갓을 쓰(蓋首)고, 푸른 옷을 입히려 한 때도 있으나 끝내 흰옷으로 돌아왔다. 但 갓과 머리 따는 관습은 정착됐다.

外出할 때에는 꼭 두루마기를 입었다. 砂漠기후는 덥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는 옆구리 等 여기저기 터져 있는 바람 잘 통하는 옷을 입고 살았고, 戰鬪보다는 精神세계를 중요시하는 평화로운 民族이었다. 일본인들의 帶刀생활, 계속된 倭寇의 기록 등으로 보았을 때 일본인들의 好戰性向을 쉽게 볼 수 있고, 반대로 우리민족의 律法尊重 性向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에 대한 이설(異說)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를 보면 한웅천황이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큰 뜻을 품고, 풍백·우사·운사의 신관과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곡·명·병·형·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해서 신시(神市)를 베풀었다 하고, 한웅천황의 아들인 단군왕검은 홍익인간의 뜻을 받들어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좀더 자세히 기록되고 있는데, 한웅천황이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도(天道)를 크게 깨치시고 종교를 베풀었다(桓雄開天以三神設敎)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 지금의 백두산이다. 또한 그것이 현재의 통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태백산에 대하여 최근 어떤 학자는 중앙 아시아(중국 신강성)의 천산(天山)이라 주장하고, 또 어떤 학자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라 주장한다. 이에 따라 부득이 이들 주장의 오류에 대해 비판한다.

1) 중국 신강성의 천산설과 그 비판

어떤 학자는 "천산(天山)에서 동으로 뻗어내린 준령을 따라가면 삼위태백(三危太白)과 흑수(黑水)가 있고, 이어서 곤륜산맥(崑崙山脈)이 뻗어내렸다"고 주장하면서 {삼국유사}의 태백산(太白山)을 중국 신강성(新疆省)의 천산(天山)이라 주장한다. 심지어는 태백산·천산·곤륜산·설산·백두산이 모두 동일한 산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우리민족이 신성시하는 백두산은 같은 산인데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세계지도를 펴고 보면 중앙 아시아(중국 신강성)에 천산산맥과 천산(天山)이 있고, 삼위산도 있다. 또한 중국대륙 서쪽에 곤륜산맥도 있다. 특히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천산을 설산 또는 백산(태백산)이라 하고, 설산을 히마리아산(喜馬拉雅山)이라, 또한 곤륜산(崑崙山)을 히마리야산(喜馬拉耶山)이라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곧 어느 측면에서 보면 태백산·천산·설산·곤륜산·백두산은 동일한 산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만약 {삼국유사}의 태백산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이라 가정할 경우, 백두산이라는 호칭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주장인가 하는 문제이다. 문제의 발단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태백산이라는 사실은 학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나, 동시에 천산이며 설산이고 곤륜산인데, 그러한 사실이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둘째, 중국 대륙 서쪽에 곤륜산맥이 있음으로써 곤륜산도 중국에 무조건 있다고 믿는 지리지식의 부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학설의 모순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거로 제시한 문장을 보면 "천산(天山)에서 동으로 뻗어내린 준령을 따라가면 삼위태백(三危太白)이 있다"고 하여 천산과 삼위태백은 다른 산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산으로 파악한 모순을 범하고 있다.
둘째, 天山에서 동으로 준령을 따라가면 三危太白이 있다고 했는데, 지도에 삼위산과 태백산은 있으나 삼위태백은 없다. 또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도 삼위산과 태백산은 있으나 삼위태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태백이 있다고 한 근거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더욱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환국의 말에 천산에서 한웅천황 일행이 동으로 이동할 때, 한웅천황은 태백산으로 내려갔고, 반고(盤固)는 삼위산으로 내려갔다고 하여 태백산과 삼위산은 서로 다른 산이다. 그런데 삼위태백을 하나의 산으로 파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삼위태백이 하나의 산이라면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태백산이란 이름은 이 지구상의 특정 산에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지역, 여러 개의 산에 붙여진 보통명사이다. 곧 태백산은 우리나라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으며, 중국에도 있다. 그래서 중앙 아시아의 천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일명 태백산일 수 있다. 이 경우 {삼국유사}의 태백산이 오로지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지칭하고,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2) 중국 감숙성의 삼위산설과 그 비판

또 어떤 학자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을 {삼국유사}의 태백산이라 주장한다. 아울러 백두산이라는 호칭도 중국의 삼위산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비판하면, 첫째, {중국고금지명대사전} 태백산조를 보면,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 縣)에 대태백(大太白)·이태백(二太白)·삼태백(三太白)이 있고, 거기에 삼지(三池)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태백산을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 단정함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곧 삼지삼태백(三池三太白)이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섬서성 미현의 삼지삼태백(三池三太白)이 삼위산(三危山)이라면 어째서 감숙성 돈황의 삼위산을 섬서성 미현의 삼지 삼태백에 가져다 붙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둘째, 삼위태백은 하나의 산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두 개의 산을 지칭한 표현이다. 그런데 삼위태백을 하나의 산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약 삼위태백이 하나의 산이라면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태백산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따라서 중국 감숙성 돈황의 삼위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모두 태백산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오로지 중국의 삼위산을 지칭하고,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주장하는 점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환단학숙-
 
3.우랄알타이산맥지대  


우리나라의 인터넷자료나 저서 자료가운데의 일부를 안내합니다.

1.한국桓國
 한단고기는 한국桓國은 7분의 한인께서 3301년동안 천해天海와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하는 땅에서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땅을 12연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습니다.
여기서 천해天海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서 바이칼은 '밝안'으로 이는 밝음이 시작되는 호수라는 말입니다. 천산天山은 중앙아시아의 한탱그리산입니다. 그리고 바이칼 호수와 한탱그리산의 중간쯤에 알타이어족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는 알타이 산이 있습니다.
소위 한국이란 인류 최초의 국가임과 동시에 우랄알타이어족의 최초의 국가인 것입니다.
한단고기는 한국을 세운 한인할아버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시베리아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계시니 그 밝음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가르침은 만물을 낳았다" 라고 했습니다.이 내용은 우리 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의 기원이 멀리 9000년 이전의 한국桓國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 다시말해 태양신 사상은 이후로 세워진 모든 한민족 국가에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의 거의 모든 민족과 국가에 깊이 영향을 준 중요한 사상입니다. 또한 '시베리아斯白力'란 '새밝'으로서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라는 의미로 우리 고대국가의 모든 이름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새밝은 '셔블'로서 서라벌이며 또한 지금 우리의 수도 서울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한가지 더 밝히면 서라벌의 계림鷄林은 '닭이 있는 숲'입니다. 여기서 닭은 곧 닥이며 닥은 대가리로서 탱그리-당골-단군입니다. 즉 단군이 머무는 숲.천하의 중심이되는 숲이라는 의미입니다.만년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지금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일관된 사상체계에서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배달국
한단고기는 배달Paedal국이 한국桓國을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배달Paedal국은 약 6000년전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사이에서 나라를 세웠다 했습니다. 삼위三危는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과 만주의 백두산白頭山과의 중간지점인 북중국에 위치합니다. 태백太白은 흔히 백두산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더 연구해야 할 대상일 것입니다.중앙아시아의 천산과 만주의 백두산은 지나치게 먼거리입니다. 따라서 천산과 백두산의 중간쯤이 배달Paedal국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그 위치는 북중국의 서안西安 근처의 4166m의 태백산太白山으로 이른바 삼위三危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만주의 중간 지점에 속합니다.
한국이 인류 최초의 국가라면 배달Paedal국은 인류최초로 문자(鹿圖文字)를 만들고 역법(歷法-일년을 365와 4분의 1일로 확정)을 만들었으며, 불로 익혀 먹는 법 등을 발견하고 팔괘를 만드는 등 가히 인류 문화와 문명의 근본을 세운 나라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던 천부경天符經을 녹도문자로 기록했고 삼일신고와 366사(참전계경)그리고 한역을 만들어 전함으로서 인류 종교와 사상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 화백和白제도를 사용함으로서 민주정치의 근본이 되었습니다.배달Paedal국은 18분의 한웅할아버지께서 156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셨습니다.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배달Paedal국의 5대천황 태우의천황의 막대아들과 막내딸이 곧 복희와 여와씨입니다. 이분들은 소위 중국의 한족들이 말하는 삼황오제의 삼황의 맨꼭대기가 되는 인물입니다.즉 배달Paedal국의 잔가지중의 하나가 자나족문명을 일으켰음을 말하는 것입니다.태호복희란 말도 태호는 곧 '탱그리'로서 당골,단군입니다. 복희는 곧 '밝'으로서 밝음이니 배달Paedal과 같은 말입니다. 이는 곧 '머리밝은'이란 말입니다. 태백산의 태가 탱그리,백이 밝으로 머리밝은산입니다.백두산또한 머리밝은산입니다.천하의 중심이되는 인물이라는 의미일때 태호복희, 천하의 중심이되는 산일때 태백산,백두산인 것입니다.
3.고조선
고조선은 한국이 천산(한탱그리산),배달국이 태백산을 중요시한 것처럼 백두산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단군삼경檀君三京을 나라를 운영하는 축으로 삼았습니다. 단군삼경은 중심에 아사달 남쪽에 평양 서쪽에 안시성입니다.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으로 추정되지만 안시성과 평양의 위치는 분명치 않습니다.고조선은 왕검할아버지께서 창업한 이래 47대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2096년간 존속한 나라입니다. 여기에 북부여의 고무서단군까지는 다시 5대가 추가됩니다.고조선은 배달국이래 전한 천부경,삼일신고,366사(참전계경)을 계승하고 왕검할아버지께서는 이 세가지 경전의 진리를 쉽고 간단하게 압축한 경전인 단군팔조교를 고조선 창업과 함께 반포하였습니다.그리고 2세 부루단군께서는 어아가,3세 가륵단군께서는 중일경, 11세 도해단군께서는 천지인경,33세 감물단군께서는 영세위법등의 여러 현묘한 경전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특히 단군조선은 당시 세계를 휩쓸었던 대홍수(9년홍수)를 토목공학기술을 사용하여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선진과학국입니다.훗날 고조선의 2세단군이 되시는 부루태자께서 한족들이 대대로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노래하는 요순시대에 그들이 9년홍수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했음이 여러 역사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국가의 존망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술이었던 이른바 오행치수로 알려진 치산치수의 과학적 기술은 실로 단군조선이 원조인 것입니다. 천부경,삼일신고,366사와 단군팔조교등의 많은 경전에서 알 수 있는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고조선의 정신문명과 오행치수로 알 수 있는 치산치수의 선진과학기술은 무려 2000년이 넘는 왕국을 존속시키는 힘이었다고 보여집니다.그리고 고조선은 훗날 고구려,백제,신라등의 우리 고대국가는 물론이고 헝가리,요,몽고,터어키,금,청등의 여러나라에도 그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원형을 제공한 중요한 나라입니다.
내용출처 : http://ihanmon.com.ne.kr/go/한국桓國.hwp

답변들  
기원전 7197년, 안파견이 세운 한국이겠죠

cordmftkfkdg (2003-11-18 17:36 작성) 이의제기
고구려 사람들에게는 천민족(天民族) 신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일반적인 종교 신화와 비슷하죠..
끝부분을 보면
"그 기름진 땅에 모두가 살지 못하여, 천해(지금의 바이칼 호)의 동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안파견이 그 사람들을 이끌고 한국(BC 7197-BC 2540?)을 세웠다."
라고 합니다.
천민족 신화에 따르면 문자를 자기네들이 개발했다나..
한국 이후의 나라인 고조선과 배달국은 별개의 나라입니다.
배달국. BC 2540? ~ BC 2335?
고조선. BC 2333? ~ BC 108
그러니까 한국(환국?-_-)과 고조선 사이의 나라가 배달국입니다.
내용출처 : [대조영과 발해] 환단학숙


4.바이칼호지대  


우리나라의 인터넷자료나 저서 자료가운데의 일부를 안내합니다.

1. 환국과 사서기록....환단고기...

환인과 환웅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타난 한(韓)민족에 대한 기록을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사서의 신빙성을 의심하기 이전에 생활상 반영에 감탄하고 한(韓)민족의 역사단계에 비정하면 구석기시대 말기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서의 검증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검토를 필요로 하는데 이유는 인간의 생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고학에서 해석이 달라지면 당시의 문화 담당주체가 바뀌든지 유물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으로 역사왜곡이 사서보다 높으므로 고고학은 사서와 상호보완관계에서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고대의 인류활동은 구석기시대부터 농경을 시작하는 신석기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로 나누며 역사의 시작을 신석기시대 이후로 봅니다.

이유는 도시가 세워지고 제도가 시행되는 사회체계의 모습을 보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륙의 발해연안과 한반도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는데 수많은 구석기와 신석기유적의 발굴은 문명의 개화가 대륙의 동부지역(발해연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도- 환국(노랑색), 고조선(푸른색)

<환단고기>가 기록하는 인류의 생활상을 검토해 보면서 고고학적 연대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본다.

<환단고기>

[옛날 시베리아하늘에 환인씨(桓因氏)가 살고 있었는데 환웅씨(桓雄氏)로 하여금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으로 내려가 신시(神市)를 열도록 하였으며 그후 단군씨(檀君氏)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해 조선(朝鮮)을 개국하였다]

이 기록으로 수천년간의 한(韓)민족의 역사를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세계의 많은 사서 중에서 그 민족의 발원지부터 이동하는 구체적인 역사를 기술한 예가 많지 않음을 볼 때 <환단고기>가 한(韓)민족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내용만으로도 연구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서술도 담겨있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정치사위주의 단순한 민족사로 보기 어렵고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역사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韓)민족의 시원에 대해서 <환단고기>에는 환인(桓因)부터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우리 환(桓)의 건국은 가장 오래되었는데 일신(一神)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광명은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중략) ...이에 환인(桓因)은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사백력(斯白力)은 시베리아의 한자식 표기이고 이후 환인은 7대를 전했는데 역년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기록은 환인의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보면 구석기시대에 해당함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사서를 보면 어느민족이나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사실을 모태로 하여 신격화시키는데 <환단고기>에도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고기에 파나류산(波奈留山)밑에 환인(桓因)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중략)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 2만리니 환국(桓國)이요 나누면 비리국, 양운국... (중략) ...이니 모두 12국이다. 천해(天海)는 지금 북해(北海)라 한다. 7세를 전하여 역년이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천해는 지금의 바이칼호를 말하고 바이칼이란 이름도 알타이어계통으로 한(韓)민족의 '밝' 명칭의 연음화 현상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칼호 서남쪽에 사이안산이 있는데 바이칼호인 천해와 비교되는 천산인 파나류산과 관계가 있으며 바이칼 동쪽을 [Trans-Baikal]이라 하여 삼림으로 뒤덮인 평원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기록과 비슷한 내용이 중국의 25사인 <진서>'사이전'에도 나오고 있는데 내용을 살펴봅니다.

<진서>'사이전'

[비리국은 숙신의 북서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2만호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또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2만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5만여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야하는데 이를 계산해보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하는 거리이다]

이렇게 두개의 사서기록을 보면 역사상 실존했다는 것이고 그 강역도 5만리라고 일치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태백일사'

[조대기에 옛날 한인이 있었는데 천산(天山)에 내려와 거하시며 천신에 제사지내고 정명인민(定命人民), 섭치(攝治)하시고 들에 사시메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  (중략)   ...삼성밀기에 파나류산(波奈留山)밑에 환인씨(桓因氏)의 국(國)이 있어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환인에 대한 유사한 내용으로 '파나류'는 알타이어계통의 말로 천산으로 통한다고 했고 '파나류'는 우리말에서 하늘천(天)의 '하날'과 관련된 발음으로 보인다.

참고- 바이칼지역

http://blog.naver.com/casahoo/20001462819 

실제로 20000년전 구석기문화가 남부시베리아에서 전개되는데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곤충과 짐승의 피해를 당한 시기는 구석기시대외에는 없었으므로 이 기록은 타당성이 있는 표현입니다.

남부시베리아 구석기유적에서 큰 짐승뼈와 나무가지로 기둥과 지붕을 엮은 반지하식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사서의 기록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부시베리아 바이칼호의 구석기유적에서 한(韓)민족의 선조들이 생활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의 유골을 조사해 본 결과 황인종에 속하는 몽골리안이 있었는데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샘계 백인종의 유골들로 대체됩니다.

이러한 시베리아지역 구석기유적에 대한 발굴이 1960년부터 본격화되어 최근에 알려졌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발굴성과이전에 기록된 것이므로 문헌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환웅에 대한 내용은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아 풍백, 우사, 운사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아래에서 신시(神市)를 열어 나라를 배달(培達)이라 하였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환웅에 대한기록을 학계에서는 청동기문화를 지닌 환웅세력이 신석기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을 동화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에는 환웅(桓雄)시대가 고고학상의 신석기문화의 단계로 기록되어 있고 대륙의 발해지역에 신석기로 홍산문명(紅山文明)이 있는데 홍산문명은 한(韓)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혼인의 예법을 정하여 짐승가죽으로써 패물을 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
여기서 경종(耕種)과 유축(有畜)은 신석기시대의 중반기에 나타나는 경제형태로 특히 짐승가죽인 수피(獸皮)로 예물을 삼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상을 전달하는 표현입니다.
구석기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지 않은 시대로 군혼(群婚)이나 특정배우자가 없고 공동체생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웅이[혼가의 예법을 정했다]는 것은 구석기의 무리중심 사회에서 가족단위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하므로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참고- 동이유적지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24502 

그리고 시장을 열고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신석기부터인데 이것은 환인(桓因)시대의 자급자족경제와는 다른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우연한 기록이 아닙니다.

<환단고기>'태백일사'

[풍백 석제라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 동굴속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이 기록은 신석기의 주거지가 반지하식 움집이고 동굴유적이 발견되는 점에 대해 부연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고고학적 시대상황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웅족과 호족세력의 융합에 관한 것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환웅이 처음 내려왔을 때에 새로 살기 시작한 웅족(熊族)과 옛부터 있었던 호족(虎族)으로 기록하고 이 두 종족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통혼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조선의 단제기록에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에서 수련하다가 곰만 여자로 변했다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표현한 것으로 환웅이 두 종족과 융합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웅족에 동화되어 두번째 계층에 속한 웅족과 호족은 세력을 잃고 하층에 속한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으로 보이며 이와 유사한 상황의 고고학적 물증이 동북아시아지역에 있다.

대륙북부지역과 발해연안, 요동반도, 남만주지역은 농경생활을 하고 가축을 사육하는 신석기가 BC.6000년경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세석기를 융합해서 신석기의 중심문화권으로 발전하는데 북만주 흑룡강과 연해주지역에만 세석기전통이 부분적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은 두 문화가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는데 수렵생활의 구석기전통의 세석기가 새로 등장한 신석기계통의 농경문화에 대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현상은 특히 발해연안과 만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환단고기>는 너무 완벽한 고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말기의 학문단계를 고려할 때 도저히 창작한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고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봐야 합니다.

답변참고 -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25350
출처 :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25350 -환단학숙 -


5.대(소)흥안령산맥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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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안령 산맥(길이 1,200km, 폭 200km, 높이 1,000~1,500m)
만주와 몽고를 나누는 축은 강으로 보면 헤를렌강이며 이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동과 서를 기준으로 나누면 대흥안령산맥이다.몽고고원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지나면 만주 평원으로 뚝 떨어지는 공간이 나온다.대흥 안령산맥의 북쪽 끝에서 소흥 안령 산맥이 뻗어 장백산맥으로 이어진다. 장백산맥은 현 한반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축으로 지나가는 산맥이다.이 산맥이 있어서 한반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대흥 안령산맥과 장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마치 알을 품은 것처럼 타원형의 평원이다. 이 지역의 중심지역의 작은 산악을 중심산으로 삼았으며 백두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후일 한반도로 내려와 1900년 이후에 새로운 상징으로 백두산을 중심산으로 삼은 것이다.
문명의 난생신화와 흑계룡!

백두산은 민족 이동과 함께 중요한 신앙과 정신적인 상징의 대상이다. 항시 정북에 위치하고 있다.중앙아시아에서는 힌두쿠시 산과 칸탱크리 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신강성에서는 천산산맥의 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고 서안에 수도를 삼을 때에는 삼서성에 있는 태백산을, 북경에 수도를 삼았을 때에는 의무려산을, 만주에서는 길림성에 있는 북산(베이산)을 몽고 동부에서는 초이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 즉 백두산은 하나의 산이 아닌 민족의 중심지역의 북쪽을 백두산으로 삼은 것이다.

만주와 몽고를 나누는 축은 강으로 보면 헤를렌강이며 이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동과 서를 기준으로 나누면 대흥안령산맥이다.몽고고원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지나면 만주 평원으로 뚝 떨어지는 공간이 나온다.대흥 안령산맥의 북쪽 끝에서 소흥 안령 산맥이 뻗어 장백산맥으로 이어진다. 장백산맥은 현 한반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축으로 지나가는 산맥이다.이 산맥이 있어서 한반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대흥 안령산맥과 장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마치 알을 품은 것처럼 타원형의 평원이다. 이 지역의 중심지역의 작은 산악을 중심산으로 삼았으며 백두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후일 한반도로 내려와 1900년 이후에 새로운 상징으로 백두산을 중심산으로 삼은 것이다.

 

 

 만주는 두개의 지역이며 그 뜻은 가득찬 땅(난생설화)을 상징


회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지명이며 이씨 조선의 세력 기반이 되는 지방이다.그러나 이 지방은 청원만족자치구지역이며 청나라가 태생한 곳이라 알려진 곳이다.그리고 길림성 길림과 장춘 사이에 있는 북산이 천하 제일의 명산이라 지칭되며 여러 만주족 유적이 있다.
 
그러나 만주족이 아닌 조선족의 유적이다. 유목 연합이기 때문에 같은 뿌리를 기반으로 출발을 하기 때문이다.만주는 또 다른 난생지역의 계룡지역인 것이다. 그 상징을 흑룡으로 보는 것이며 고구려의 상징이자 고조선의 후신으로 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는 신만주이며 원만주는 신강성 만주이다.둘다 지형이 계란형이다. 그래서 계룡산이라 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상형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구만주(신강성)는 황계룡 신만주(간도)는 흑계룡이다.

이성계의 고향과 함흥처사의 비밀

이성계가 태어난 고향은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이다.영흥과 길주를 합하여 영길도라고 하였으니 영흥은 길림성에서 그리 멀지 않는 요충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영흥은 요양이나 심양일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요녕성이 영흥지방이며 길림성이 길주지방이 된다.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활동한 지역이다.이 시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쌍성총관부는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가 된다.이성계도 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다.

고려말에 요녕성 길림성 일대 상황을 보면 이성계가 예맥족/ 만주족/조선족의 활동무대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만주 일대에서 세력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금나라에서 몽고로 몽고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세력 순환의 격동 속에서 이성계의 가계 내력이다.이 시기에 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내조하러 왔다. 여진족과 몽고족 틈바구니에 있는 만주에 기반을 둔 이성계 집안이 지방 호족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태조의 발상지는 청태조의 선조인 이성계의 발상지이다.후일 임진왜란 당시에 청나라에서 조선에게 먼저 왜의 공격에 격분하여 먼저 도워 주겠다고 하면서 <쥐 새끼 같은 왜를 몰아내 부모님의 나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나온다.> 조선은 우리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성이 <애각신라>라는 사실이다. 신라의 후예를 지칭한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 금-후금을 세운 여진족도 김씨 후손을 내세운 것이다.태조 이성계 이후에 왕자의 난이 있고 이성계가 함흥으로 세력 기반을 옮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처사는 바로 만주에 세력 기반을 둔 만주족의 근거지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한 것이지 자기 고향에 휴양삼아 기거한 것이 아니다.

이성계의 초상화는 푸른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다른 왕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외인데 후일 청나라의 상징은 푸른색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피줄이자 가계인 것이다. 같은 뿌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청색의 곤룡포와 청나라의 국호 그리고 만주는 하나로 연결된다.몽고에서는 <따르따르>족라고 하며 우리 문헌에는 <조선조선>족 이라 부르는데 <조선>이 <따르>인 것이다.

조선이 황제국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진족도 이성계 가계를 정통맥으로 삼았으나 나라를 세우고 황제국으로 부상하자 후기 계승자인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를 정통맥으로 삼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조 발상지가 청조 발상지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에서도 연동되며 이성계 가계 유목족 내력을 숨기게 된다.새로운 가계인 전주 이씨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있다 보니 유목족의 가계 역사에 대해 미화 작업을 함과 동시에 여진족과의 연계된 부분은 조작하게 된다.

대대로 활동해온 만주족의 무대가 어느 날 갑자기 여진족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된다.백두산 경계비에 일어난 사건은 이성계 고향을 차지하기 위한 정통성 싸움인 것이다.만주에서 존재한 청나라 유적은 조선족의 유적을 바꿔치기 한 것이며 실제 청나라가 일어난 지역은 만주가 아닌 신강성 지역이며,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동진을 한 것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동화되었으며 실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일부 민족이 남아있는 지방이 신강성 일대에 약간 남아있으며 만주에는 거의 없다. 이것은 바로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나라가 중국을 침공하고 그 빈 공간을 한반도 세력이 차지하여 간도를 개발했다는 논리는 허구 일 뿐이며 청나라를 세운 후금이 자기 민족의 발상지를 소홀히 할 리는 없다.청나라 건국지와 수도는 절대 요녕성을 중심으로 하는 심양이 아니다. 신강성이나 내몽고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다.

우리는 중국으로 부터 간도반환 운동과 함께 러시아로 부터 연해주와 사할린 반환운동을 해야 한다. 아직 국제법 상 법적 청구가 가능한 시점이다. 이순신이 지켜낸 녹둔도가 사할린이며 우리는 녹둔도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임상현, 국민의 소리 기자 (www.peoplevoice.co.kr) -환단학숙-




7.태백산지대(현재의 태백산)
삼위와 태백은 각각 중국 돈황현의 삼위산과 백두산으로 추정되며 그보다 더 서쪽일수도.. 태백산의 위치의 대해서는 지금의 백두산과 중국의 태백산설이 있습니다.결코 강원도의 태백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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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하여 인간세상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환인이 이를 알고 지상세계를 두루 내려다보니 태백산지역이 인간들에게 큰 도움을 줌[弘益人間]직한지라,이에 천부인 세개를 중어 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환웅은 무리 3천여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그 곳을 신시(紳市)라 부르고,수수로 환웅천왕이라 하였다.그는 비,바람,구름을 주관하는 어른들에게 농사와 생명,질병,형벌과 선악을 맡게하고,인간살이에 관한 360여 가지 일을 다스리게 하여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그 때 곰 한마리와 호랑이 한마리가 있어,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환웅은 영험 있는 쑥과 마늘 스므톨<20개씩>은 주면서"너희들은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으며 동굴생활을 하였으나,호랑이은 견디지못하고 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고,곰은 사람이 되었다. 여인이된 곰(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신단수에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고 환웅은 이를보고 잠시 인간모습을 하여 웅녀와 혼인을해 아들은 낳았으니,그이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李裕)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

내용은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신앙·풍습·정치·경제·예술·철학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 있다.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1363년(공민왕 12) 문정공 이암(李)이 전한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하·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발해·고려의 대외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수 있다. 3국이 각기 건국 초기의 부족국가적(部族國家的)인 틀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기까지의 시기이다. 3국은 108년 중국 한(漢)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둔 한사군(漢四郡)의 세력이 강원도와 충청남도의 일부에까지 미치자 이에 눌려 긴 정체기(停滯期)를 보냈다. 313년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을 차지하이어 대방군(帶方郡) 등 한반도에 깊숙이 뿌리 박았던 중국 세력을 몰아내면서 3국은 세력신장(伸張)을 위한 각축(角逐)에 들어갔다.-환단학숙-

쥬신의 이두식 표기는 조선, 숙신, 주리진, 주신 등이다. 따라서 숙신, 누, 물길, 말갈, 여진, 만주 등의 민족이름은 모두 쥬신족과 동일한 배달민족이다.
조선 : 원래 우리 발음은 '쥬신'이며 그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사는 온 누리를 뜻한다. 환웅,배달님(단군) 선조들께서 태백산(불함산,백두산) 북쪽 아사달에서 일어나 만주일대에 널리 자리잡았다
숙신 :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발음은 여전히 쥬신이다 (중국인은 '쑤우신'이라 발음).
여진 :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발음은 쥬리진(중국인은 '뉴우신'이라 발음).
이들 민족이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다 같은 쥬신족으로 자랑스런 배달겨레이다.
동이족,중국인들은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중국 시전의 동이는 '떳떳하다','당당하다'인데 사기에는 '상하다',죽이다'의 뜻으로 쓰인데서 중화족의 동이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오랑캐로 알고 있는 등 역사에 대한 열패감이 만연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의식이다. 동이란 '동쪽의 큰 활을 쓰는 대인'을 의미할 뿐이다.

동방지인이대종궁 (동방사람들은 대인으로써 활을 따른다.)
사기에는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중화족이다."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족은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족의 형성
지금으로부터 9000여년경 동이족의 한인씨가 파미르 고원 아래에 한국들 세우고 그 중심을 바이칼 호 근처로 옮겼다. 이 때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먹고 7세를 전하였으나 연대를 알 수 없고 이 시기를 한국시대라 한다.
우리 조상은 파내류산(:파미르 고원)으로부터 사백력(:시베리아)으로 옮겨왔다가 서기전 7000년경에는 여기서 갈랒U 세계 여러 곳으로 이동했다. 동북쪽의 일족은 베링해를 건너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고, 동쪽 끝으로 사할린에서 일본 땅의 왜의 일부가 되었고, 서북쪽으로는 핀란드, 서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을 일으켰으며, 남쪽으로는 치우 천황의 장군 형요가 티베트를 정복하여 800년간을 통치하였다.
동양의 역사는 처음부터 쥬신족(조선족=동이족)과 중화족(중화족=화산족, 화족, 화하족)간의 패권다툼이었다. 처음에는 기마 민족의 절대 우세 속에서 중화족의 발은 내륙지방 화산주위에 묶이고, 황해안의 진출은 철저히 봉쇄 당하였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차츰 세력이 역전되었다.
바이칼 호에서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한 우라 조상은 민족의 영산 불함산, 지금의 백두산)에 도착하였다. 단군은 각 나라의 님 들이 아사달에 모여 군장회의를 통해 선출한 대제사장이며 종교적. 정치적 최고 통수권자이다.
우리 배달 민족은 한님(:하느님), (지신), 단군의 삼신을 믿었고, 수두를 중심으로 대단군의 명령으로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기마 민족의 기동성으로 황하족을 제압하여 내륙 쪽에 묶어 봉쇄하였다.


환웅시대(桓雄時代) : 18대 1565년
드디어 민족간에 질서가 잡히니 그들을 지도할 천황이 필요하게 었다. 이때 스스로 한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한웅씨가 나타나게 되었다. 태백산 신단수(성스러운 박달나무)아래 최초의 도시인 신시를 세우고 도읍하니 이가 바로 1대 한웅 거발한이다.
천황은 나라 이름을 밝달나라(배달나라)라 하고 전 쥬신을 통치하였다. 우리 배달나라는 거발한 천황아래 전 쥬신이 뭉쳤으니 이른바 동이 9족이다. 그 영토는 천해(:바이칼 호)로부터 남쪽의 양쯔강까지 남북 5만리, 서쪽의 몽고 사막으로부터 동쪽의 대해까지 동서 2만리의 강역이 우리의 영토이다.

이로써 서기전 3898년에서 서기전 2333년의 18대 1565년간의 한웅 시대가 열렸다.
서기전 3512년 제 5대 태우의천황의 큰 아들은 제 6대 천황으로 즉위하고, 막내인 태호가 삼황의 하나인 복희씨(삼황 중 하나인 복희씨)이다.

서기전 3240년 제 8대 천황 안부련 한웅은 강수지역의 신국(:현재 산둥반도)을 화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소전 장군을 강수로 파견하여 최초로 식민 통치를 위한 총독을 파견하였다.
소전의 아들 신농은 농경기술을 발전시켜 황하족의 영토를 옥토로 바꾸고 성곽을 쌓았으니 이로써 동이족의 기마전술에 속수무책이던 황하족이 저항하였다.
이에 제 10대 천황 갈고 한웅은 사신을 보내 신농씨를 문책하자 신농씨는 사죄하며 제후국으로 조공을 바치고 천황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공상의 맹약을 하니 이로써 쥬신족과 중화족의 최초 국경조약이 이루어졌다.
서기전 2707년 배달민족의 불세출의 대영웅인 자오지천황이 제 14대 한웅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치우천황은 중국인이 전쟁의 신으로 모실 정도로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하여 탁록으로 진격하여 성을 쌓고 저항하던 신농씨의 후예 유망(5제중 염제)을 섬멸하여 공상을 되찾고 화하족 12제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동이족의 식민지배를 벗어나려는 화족은 공손씨 헌원이 중심이 되어 화산족과 하족이 하나가 되어 화하족이 탄생하였다.이리하여 봉황을 숭배하는 대쥬신과 용을 숭배하는 중화족의 10년간 73회의 대회전을 치루게 된다. 그 결과 치우 천황은 신무기(청동기) 사용과 뛰어난 용병술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고 헌원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를 화하족의 통치권을 준 황제(:5제 중의 하나)로 임명하여 쥬신의 제후국으로 삼았다. 치우 천황은 수도를 산둥 반도의 청구로 옮겨 불쥬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단군님(=배달임금)은 제 18대 거불단한웅의 큰 아들로 서울을 청구에서 아사달로 재 천도하고 나라이름을 쥬신이라 하고, 이 후 청구 땅은 치우천황의 후손에게 계속 통치하게 하니 불쥬신이 되었다.

단군시대(檀君時代) : 47대 2096년
서기전 2333년 백두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쥬신(朝鮮)우로 개칭하였다. 이때를 단기 원년으로 하여 단군쥬신이라 부르며, 그 역사를 배달나라와 구분한다. 단군쥬신시대에는 3신 5제의 신설에 따라 3경 5부제를 운영하였다.
3경은 신쥬신(:만주북부∼한반도 북부)의 서울 아스라(上京), 불쥬신(:요하 서쪽∼양쯔강 남부)의 서울 아리터(중경), 말쥬신(:요하 동쪽∼한반도 남부)의 서울 펴라이다.
단군님 을 천자로 하는 쥬신제국은 종교적으로 수두를 중심으로 통일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통치영역이 넓어 3 쥬신영역으로 신쥬신은 대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불쥬신은 기씨, 말쥬신은 한씨가 통치하였다. 대단군은 수두 최고의 통치자로 각 나라들의 마찰을 중재하고 매 3년마다 대군장 회의를 주관하였다.
서기전2167년 단군님 태자 부루는 치우천왕이 남만정벌에서 편입시킨 가장 변방의 나라인 남국의 하나라의 우에게 오행치수법을 가르쳐 홍수를 다스리게 하니 중국의 넓은땅이 옥토가 되었다. 또한 유주와 영주의 영토권을 분명히 하고 병주를 양보하는 부루와 우의 도산회의가 열렸다.
서기전 2221년 부루단군은 벼농사 장려와 패엽전(:조개껍데기에 구멍을 뚫어 사용)을사용하였다.
서기전 2183년 태자 가륵이 제3대 대단군의 천왕에 올랐다.
서기전 2173년 소시모리의 반란을 여수기가 진압해 소시모리의 부장 협야노가 탈출하여 삼도(;일본의 구주)를 정벌하여 대추장이 된다.
서기전 2137년 제3대 오사구단군에서 제21대 소태단군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서기전 1766년 하가 멸망되고 은이 건국되었다. 이때 색불루 단군시 총 동원령을 내려 은을 정벌하고 속국으로 삼았다.
서기전 1285년 색불루가 22대 단군에 즉위하여 백악산에 도읍하고 백악산 아사달이라 칭함.(은왕조는 중화족 정벌 후 쥬신영토를 잠식하다)
서기전 125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국경수비대장 신독의 반란이 일어나다.
서기전 1238년 아사달을 탈환하고 태자 아홀이 제23대 대단군에 즉위하다.
서기전 1250년 솔라가 제 25대 대단군에 즉위하다. 이때 서여를 단군으로 삼아 남쪽을 통치하게 하였다.(신쥬신의 속국)

개아지(奇子:태양신 아들-신쥬신 속국) 주신시대
서여 단군기자 때는 은 말기로 중원의 주(周)나라가 등장하였다.
강태공은 은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니 은의 충신이었던 기자(奇子)는 탈출하여 개아지쥬신의 님 성에 도착하여 제 3대 기자 솔귀를 배알하고 영토를 얻어 정착한다. 서기전 909년 신쥬신의 나휴천황 때 주 무왕(武王)은 그 동안의 조공을 끊었다.
서기전 902년 신쥬신은 명장 고력을 파견하여 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다시 조공을 받고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래제전쟁
제 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산둥 진출의 요지인 래국을 정벌하여 산둥 반도로 진출하였다. 이에 제 36대 매륵천황은 현제를 파견하여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민족대회전을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언파불합장군의 제 1차 3도(:오늘의 일본)의 난 진압
서기전 723년 제 35대 사벌단군은 삼도의 구마소에 특사를 파견하여 언파불합장군을 보내 삼도(일본)를 평정하였다.
서기전 667년 제36대 천황 매륵천황은 삼도의 2차 왜란을 평정하였다.
서기전 426년 제 43대 물리천황은 우화충의 반란으로 영고탑에 포위되자 백민성 욕살 왕수긍이 우화충을 제거하고 천황이 죽어 후사가 끊기자 서기전 425년 제 44대 구물천황으로 즉위하니 쥬신 천황가의 혈통이 1908년만에 단절되었다.
서기전 425년 구물천황이 국호를 대부여라 개칭하였다
이때 중원에서는 황하문명을 통해 발전한 연이 강성하여 쥬신은 잦은 침입을 받게 된다. 서기 전 380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의 침입을 받다.
서기전 365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이 요서를 공격하다.
서기전 364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군을 연운도에서 격파하다.
서기전 341년 제 46대 보을천황이 연나라가 보낸 간자에게 불쥬신의 왕 해인이 암살되다. 해인 후임을 둘러싸고 쥬신의 5제가 분열기미를 보이고 연의 침략을 받다.
그러나 연을 격파하고 볼모로 받은 연의 왕자 진개에 의해 요수를 연에게 넘겨줌으로써 천황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서기전 323년 읍차 기허가 무력으로 불쥬신의 왕위 임명을 받아내다.
서기전 296년 제 47대 고열가가 대단군으로 즉위하다.
서기전 283년 제 47대 고열가가 대단군 때 오가(五加)의 욕살에게 후사를 남기고 입산하니 이로써 단군쥬신은 제 47대 2096년 만에 멸망하였다.
천황랑 해모수
서기전 238년 고열가단군 57년 해모수가 한구를 축출하고 고열가 대단군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자 불쥬신 영지를 차지하고 대단군위에 즉위하다.
서기전 206년 고진(:해모수의 동생)이 서안평으로 진격하여 불쥬신의 영지를 회복하고 고구려 후(후:동명왕-추모는 동명왕이 아님)에 봉해지다.-환단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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